텍스트 - "김연실전" 김동인

닫고 입력 시작
연실이의 아버지는 옛날 감영 의 이속 이었다. 양반 없는 평양서는 영리 들이 가장 행세하였다. 연실이의 집안도 평양서는 한때 자기로라고 뽐내던 집안이었다.

연실이는 부계 로 보아서 이 집의 맏딸이었으나, 그보다도 석 달 뒤에 난 그의 오라비동생이 그 집안의 맏상제였다. 이만한 설명이면 벌써 짐작할 수 있을 것이지만, 연실이는 김 영찰의 소실 - 퇴기 - 의 소생이었다.

김 영찰의 딸이 웬셈인지 최 이방을 닮았다는 말썽도 어려서는 적지 않게 들었지만, 연실이의 생모와 김 영찰의 사이의 정이 유난히 두터웠던 까닭인지, 소문은 소문대로 제쳐놓고 연실이는 김 영찰의 딸로 김 영찰에게는 인정이 되었다.

조선에도 민적법 이 시행될 때는, 그때 생모를 여읜 연실이는, 김 영찰의 정실의 맏딸로 민적에 오르고, 연실이보다 석 달 뒤에 난 맏아들은 민적상 연실이보다 일년 뒤에 난 한 부모의 자식으로 오르게 되었다.

조선의 개명 은 예수교라는 물결을 타고 서북 으로 먼저 들어왔다. 이 다분의 혁명적 사상과 평민 사상을 띤 종교는, 양반의 생산지인 중부 조선이며 남조선에서 잘 받지 않는 동안, 홍경래 를 산출한 서북에 먼저 들어왔다. 들어오면서는 놀라운 세력으로 퍼지기 시작하였다.

때 바야흐로 한토 에서는 애신각라 씨의 이룩한 청나라의 삼백 년 기업도 흔들림을 보고, 원세개라 여원홍이라 손일선이라 하는 이름들이 조선사람의 입으로도 수군거리우는 시절에,

예수교라는 새로운 도덕학과 그 예수교에 뒤따라 조선에 들어온 '개명 사상'이 조선에서 제일 먼저 부인한 것은, 양반 상놈의 계급, 적서 의 구별, 도덕만을 숭상하는 구학문 등이었다. 이런 사상의 당연한 결과로서, 조선 온갖 곳에 신학문의 사립학교가 설립되었다.

평양에도 청산학교 라는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학도야 학도야 백만 학도야

저기 청산 바라보게

고목은 썩어지고

영목은 소생하네.

이 학교의 교가 삼아 지은 이 창가는, 삽시간에 권학가 로 온 조선에 퍼졌다.

청산학교 창립의 뒤를 이어, 벌써 평양에 몇 군데 예배당의 부속 소학교가 설립되었다.

곧 그 뒤를 이어서 진명여학교 라 하는 여자 교육의 소학교까지 설립이 되었다.

진명학교는 설립되면서 어느덧 평양 시민에게 '기생학교'라는 부름을 들었다. 장래의 기생을 만들어낸다는 뜻이 아니었다. 현재 재학생 중에 기생이 많다는 뜻도 아니었다. 아직도 옛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평양 시민들은, 자기네의 딸을 학교에 보내기를 꺼린 것이었다.

더우기 그때의 학령 이라는 것은 열 살 이상 열 다섯 내지 열 여덟이었으매, 그런 과년한 딸을 백주에 길에 내놓으며, 더우기 새파란 남자 선생한테 글을 배운다든가 하는 일은, 가문을 더럽히는 일이며, 잘못하다가는 딸에게 학문을 가르치려다가 다른 일을 가르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진명여학교의 설립을 무시하여버렸다.

그 대신 '내외'를 그다지 엄히 지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 기생의 딸 혹은 소실의 딸들이 이 학교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되기 때문에 더우기 여염집의 딸들은 이 학교를 천시하고, 드디어 그 칭호까지도 진명학교라 부르지 않고 기생학교라 부르게까지 된 것이다.

연실이는 진명학교가 창립된 지 석 달 만에 이 학교에 입학하였다.

연실이가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단지 소실의 딸이라는 자유로운 신분만이 아니었다.

첫째로는 신학문의 취미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무론 기역 니은은 언제 배웠는지 모르는 틈에 배웠지만, 그밖에 무엇보다도 연실이에게 호기심을 일으키게 한 것은 산술이었다.

그 전 해에 소학교에 입학한 오라비동생의 학과 복습을 보살펴주다가 저절로 아라비아 숫자를 알게 되면서 어느덧 오라비보다 앞서게 되어, 오라비는 학교에서 가감을 배우는 동안, 연실이는 승과 제도 넘어서서 분수 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신학문에 취미를 갖게 한 첫째 원인이었다.

둘째로 그가 학교에 가고 싶게 된 동기는 그의 가정 사정이었다.

연실이의 아버지가 과거의 영문 이속 이라 하나, 다른 이속들보다 지체가 훨씬 떨어졌다. 다른 이속들은 대대로 이속 집안이든가, 혹은 서북 선비의 집안 후손으로, 여러 대째 내려오는 근본 있는 집안이었지만, 연실이의 아버지는 그렇지 못하였다. 연실이의 할아버지는 군정 이었다. 군정 노릇을 하며 상관의 비위를 맞추어서 돈냥이나 장만하였다.

그 장만한 돈으로 아들을 위하여 영리의 자리를 사주었다. 얼마 전만 하여도 군정의 자식이 아무리 돈이란들 영리 자리를 살 수 있으랴만, 그때 마침 유명한 M감사가 평안감사로 내려온 때라, M감사에게 돈만 바치면 아무것이라도 할 수 있었던 시대였더니만치, 감히 바라도 보지 못할 자리를 점령한 것이었다.

목적은 치부 에 있었다. 몇 해 잘 어름거려서 호방 자리만 하나 얻으면 몇십만 냥을 모으기는 여반장인 시대라, 호방을 목표로 영리의 자리를 샀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김 영찰이 호방에 오르기 전에 일청전쟁이 일어나고, 일청전쟁의 뒤에는 관제 변혁으로 김 영찰 평생의 꿈이 헛데로 돌아갔다.

이렇게 되매 김 영찰의 입장은 딱하게 되었다. 평양서는 그래도 지벌을 자랑하는 가문에서 김 영찰을 군정의 자식이라 하여 천시하였다. 그러나 김 영찰로 보자면, 자기의 아버지는 여하컨간에 관속이었더니만치 아버지 시대의 동료들과는 사귀기를 피하였다. 개밥의 도토리와 같이 비어져나왔다.

만약 이런 때에 김 영찰로서 조금만 눈을 넓게 뜨고 보았더면, 자기의 장래를 상로 든가 혹은 다른 방면에서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선조 대대로 군정 노릇을 하였고, 그 자신은 관리로까지 출세를 하였다가, 관리로서 충분히 자리도 잡아보기 전에 다시 앞길을 잃어버린 사람이라, 관료적 심정과 및 권력에 대한 동경심이 마음에 불타올라서, 다른 방면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여기서 김 영찰은 새로운 정세 아래서의 관리 자리를 얻어보려고 동분서주하였다.

이런 계급과 이런 사상의 사람의 예상사로 김 영찰은 첩 살림을 하였다.

더우기 몇 해 전만 하여도 기생들은 김 영찰을 군정의 자식이라 하여 속으로 멸시를 하였는데, 이즈음 그런 관념이 타파된 위에, 기생으로 볼지라도 예전과 달라, 행랑집 딸 술집 계집애들이 수심가깨나 하게 되면 함부로 기생이 되어, 기생의 지위가 떨어지기 때문에 누구를 괄시하든가 할 수는 없이 되어, 김 영찰 같은 사람은 이런 사회에서,

"어이, 내가 M판서 대감이 평양감사로 내려오셨을 적에, 어어..."

하며 호기를 뽑을 수 있는 고귀한 손님쯤으로 되어서, 화류계의 중심 인물쯤 되었다.

이런 가장에게 매어달린 그의 가정은 냉락한 가정이었다.

이 가정 안에서 연실이를 사랑할 수 있고 또 사랑할 의무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의 아버지뿐이어늘, 아버지라는 사람이 집에 들어오는 일조차 쉽지 않으니, 연실이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랄 수밖에 없었다.

연실이의 적모 - 민적상으로는 생모 - 는 군정의 며느리로 온 사람이니만치 교양 없이 길러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시집을 왔으면 남편에게라도 교양을 받아야 할 것인데, 남편 역시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 아내를 가르친다든가 할 만한 사람이 못되었다.

군정의 며느리로 시집온 것이 운수 좋아서 영찰의 아내가 되었다고 교만만 잔뜩 가지게 된 사람이었다.

사사에 연실이를 꾸짖었다. 잘못한 일은 둘째 두고 잘한 일이라도 꾸짖었다. 꾸짖는 때는 반드시,

"제 에미년을 닮아서..."

"쌍것의 새끼는 할 수 없어!"

하는 말 끼우기를 잊지 않았다.

자기의 소생 자식들을 책할 때도,

"쌍것의 새끼하구 늘 놀아서 그 꼴이란 말이냐?"

하고 연실이를 끌어대었다.

이런 어머니의 교육 아래서 자라는 연실이의 이복동생 들이라, 동생들이 제 누나 혹은 언니에게 대해서 취하는 태도도 자기네는 양반이요 연실이는 쌍것이라는 관념 아래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런 가정 안에서 이런 환경 아래서 자라나는 연실이는, 어린 마음에도 온갖 사물에 대한 반항심만 성장되었다.

아무 애정도 가질 수 없는 아버지는 단지 무시무시한 존재일 뿐이었다. 게다가 적모에게 흔히 듣는 바,

"그 낫살에 계집이라면 정신을 못 차리는 더러운 녀석!"

일 뿐이었다.

적모며 적모 소생의 이복동생들에게 대해서 애정이나 존경심을 못 갖는 것은 거듭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갓났을 때에 저 세상으로 간 자기의 생모에게조차 호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이런 환경의 소녀로서 가슴에 원한이 사무칠 때마다 생각나는 것은 자기의 생모이겠거늘, 표독하게도 비꼬여진 연실이의 마음은,

‘왜 그것이 화냥질을 해서 나까지 이 수모를 받게 하는가?'

하는 원망이 앞서서, 도저히 호의를 가질 수가 없었다. 부계 로 보아 양반 의 자식이라는 자긍심을 가지고 싶은데, 그것을 방해하는 모계 가 저주하고 싶었다.

이렇게 가정적으로 정 가는 데도 없고 사랑 붙일 데도 없는 연실이는, 어떤 날 자기 이모 - 노기 - 의 집에 놀러갔다가, 진명학교라는 계집애 학교가 있단 소식을 듣고, 열 살 난 소녀로서 부모의 승낙도 없이 입학 수속을 하여버린 것이다.

물론 부모에게 알리면 한번 단단한 경을 칠 줄은 번히 알았지만, 경에 단련된 연실이는 그것이 그다지 무섭지도 않았거니와, 두고두고 그 집에 박혀 있느니보다는 한번 경을 치고라도 학교에 다닐 수만 있었으면 다행이었다.

그랬는데 요행히도,

"제 에미를 닮아서 간도 큰 계집애로군. 사내로 태어났더면 역적 도모하겠네."

하는 독 있는 욕을 먹은 뒤에 비교적 순순히 승낙이 되었다. 아마 어머니로서도, 집안에서 만날 보기 싫은 상년을 보느니보다는, 낮만이라도 학교로 정배를 보내는 것이 속이 시원하였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진명여학교도 창립한 다음 해에는 도로 문을 닫아버리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학교의 창립자는 당시 이름높던 청년 지사였다. 그 창립자가 바야흐로 개화의 물결에 타고 오르려는 서북 조선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유세 하여 구하여들인 기금이 차차 학교 경영의 기초를 든든히 할 가망이 보였으나, 사위 사정의 급변화는 이 청년 지사로 하여금 자기의 사업에 정진치 못하게 하여, 그는 자기가 나고 자라고 한 땅을 등지고 멀리 해외로 망명을 하였다.

그가 외국으로 달아날 때에 고국에 남기고 간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의 노래가 온 조선 방방곡곡에 퍼지게 된 때쯤은, 진명여학교는 창립자의 후계자인 어떤 여사 가 애써 유지하여보려고 노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드디어 문을 닫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이리하여 쓸쓸한 가정에서 한때 자유로운 학원에 몸을 피하였던 연실이는, 다시 가정에 들어박히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